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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낙엽을 타고 : 기운 없는 유머에 빠지기

by silverscreen 2024. 2. 13.

 

1. 핀란드 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사랑은 낙엽을 타고(Fallen leaves)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2023년 핀란드 영화입니다. 제76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연출한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90)를 잇는 프롤레타리아 시리즈 연작이라고 하네요. 이 감독님의 작품은 이 작품이 처음이라 전작들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프롤레타리아 시리즈를 잇고 있다니까 또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두 주인공 모두 노동을 통해 현실을 살아내고 있지만, 녹록지 않아 보이거든요. 소소하게나마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로 핀란드 영화를 처음 보았습니다. 무작정 북유럽 감성이라고 해서 모던하고, 현대적이고 미래적인 영화일 것이라는 제 기대는 산산이 깨졌습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배경, 등장인물, 그들이 처한 상황 모두 제가 상상 속에서 동경해 왔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마치 80년대 한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인물들의 복장, 좋게 말하면 레트로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낡고 가난한 그들의 집, 복지 국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끊겨버린 전기 공급. 게다가 여자 주인공은 대형 마트에서 일하다가 부당한 취급에 반기를 들고 직장을 그만두는데, 그 이유가 마트에서 버려지는 유통기한이 넘은 음식을 조금 집에 가져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공사장에서 하루하루 일을 해 살아가며 트레일러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먹고 자는 생활을 하는데, 알코올 중독으로 일을 하면서도 술을 멈출 수 없어 잘리고 말지요.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도 않고, 영화의 배경이 이렇다 보니 핀란드의 80년대나 70년대가 배경인 것일까? 했지만 여자 주인공이 퇴근하며 매일 듣는 라디오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소식이 들립니다. 두 주인공이 데이트를 하면서 영화관에 가 본 영화도 아담 드라이버 주연의 데드 돈 다이이죠. 현재를 사는 두 남녀의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조금 갸우뚱하게 됩니다. 
 

2. 기운 없는 유머가 취향에 맞으신다면

 
이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핀란드 헬싱키에 사는 안나와 홀라파라는 외로운 두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마주치게 됩니다. 안나가 마트에서 잘리고,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해서 찾았던 수상한 술집 사장이 마약 거래를 하다 잡혀가는 자리에서 또다시 만난 두 사람은 첫눈에 끌렸는지 데이트를 합니다. 좀비 영화까지 잘 보고 나온 둘은 다음을 기약하면서 안나가 연락처를 쪽지에 적어 주지만, 홀라파는 그걸 홀랑 잃어버리고 말지요. 그 사실을 모르는 안나는 무료하고 외로운 일상에 나타난 인연에 설레어하면서 유기견을 데려다 키웁니다. 하지만 홀라파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지요. 어긋난 인연에 괴로워하던 둘은 다행히 다시 만나게 되고, 안나의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지만 홀라파의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고 안나는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을 잃었으니 술을 마시는 당신은 싫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둘은 외로운 삶에서 연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전체적으로 차갑고 건조하고 쓸쓸한 느낌인데 이게 유머인가 싶을 정도의 기운 없는 농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일부터 70년대 대사처럼 뚝뚝 끊어지고 부자연스러운데 엄청나게 웃긴 대사들을 하면서도 무표정해요. 그래서 지금 저 대사에 웃으라는 것인지 쓸쓸해야 하는 것인지 분위기 파악이 어렵습니다. 한 예를 들어 안나와 홀라파가 첫 데이트에서 보러 간 영화관 입구에 잔뜩 고전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정작 둘이 가서 본 영화는 짐 자무쉬 감독의 데드 돈 다이라는 좀비 영화입니다. 영화 화면을 잠깐 보여주기도 하는데 설마 좀비영화를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저는 일차로 실소가 터집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안나는 즐거웠다고만 하지만, 같이 나오는 노인 관객들이 영화가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나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 같았다고 무덤덤하게 흘러가듯 말하는 식입니다.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홀라파의 친구가 계속해서 썰렁한 농담을 하는데, 그 친구나 홀라파나 둘 다 전혀 웃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영화를 봤던 상영관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아 진지한 분위기였는데, 웃음이 터지려는 순간에도 내가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고 있나 눈치가 보였던 기억이 있네요. 하지만 관람 후기들을 보면 영화관에서 폭소하며 즐겁게 봤다는 후기들도 있어 관람 분위기에 따라 감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3. 쓸쓸하고 차가운 가운데 사랑이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자본주의의 차가운 시선으로 보면 안나와 홀라파 모두 미래가 없어 보이지요. 대책도 없어 보입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도 힘겨운 이 세상에서 위태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둘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사랑의 기회를 잡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노력해보려고도 합니다. 외롭고 무료한 삶에 사랑만 한 것이 없다는 메시지가 크게 들려옵니다. 눈이 화려하거나 극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방법이 새롭다면 언제나 먹히는 이야기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