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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맨 : 이도저도 아닌 케일럽 랜드리 존스의 원맨쇼

by silverscreen 2024. 2. 11.

 

1. 도그맨이라고 해서 히어로물을 기대하지 마라


도그맨은 프랑스의 영화감독 뤽베송의 최신작입니다. 뤽베송은 영화 레옹, 니키타, 제5원소를 거쳐 택시 같은 액션 영화를 연출하며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특유의 빠르고 거친 액션이 매력적인 작품들을 만들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팬층이 두꺼운 리암니슨의 테이큰 시리즈의 각본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연출했던 루시나 발레리안: 천 개의 행성의 도시 같은 작품들이 작품성이나 흥행 기대에 못 미치고, 비슷한 스타일의 졸작들을 만들어내면서 전성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신작 도그맨이 제8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정작이 되었다고 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때마침 SNS에 도그맨에 대한 호평들도 많았지요. 아무 정보도 없이 시간을 내어 도그맨을 보러 갔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도그맨이라고 해서 귀엽고, 용맹한 유기견들을 잔뜩 키우면서 강아지들의 도움을 받아 재치 있게 악당을 해치우는 히어로 물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가볍고 빠른 액션물로 유명한 뤽베송 감독의 작품이니 이 영화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예상은 우습게 빗나갔습니다. 물론 용맹하고 똑똑한 강아지들이 잔뜩 나오는 것도 맞고 도움을 받는 것도 맞는데 도대체가 이렇게 어둡고 무거운 작품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우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큰 트럭을 몰던, 마릴린 먼로의 핑크 드레스를 입은 남자가 피투성이인 채로 긴급 체포됩니다. 트럭 안에는 수십 마리 개들이 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경찰은 그를 구금상태로 두고 정신과 의사를 통해 알아내려고 합니다. 겨우 입을 연 더글라스 (케일럽 랜드리 존스 분)의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한 불행 그 자체였지요. "불행이 있는 곳마다, 신은 개를 보낸다." 하는 알퐁소 드 라마르틴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더글라스가 겪어야만 했던 유년기, 청년기, 그리고 현재의 불행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2. 케일럽 랜드리 존스의 연기 차력쇼


더글라스는 투견용 개를 사육하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면서도 투견용 개들은 가두어 놓고 일부러 굶기는 식으로 사납게 만들었지요. 더글라스가 개들에게 몰래 먹을 것을 주자 아버지와 형은 그를 개들과 함께 가두어 버립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어머니마저 더글라스를 두고 도망치고, 어렸던 더글라스는 형과 아버지가 걸어 놓은 GOD이라는 글자의 뒷모습으로 DOG를 읽습니다. 극적으로 구조를 요청해 탈출하지만 이미 더글라스는 아버지가 쏜 총파편에 척추를 다쳐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아동 학대의 내용 때문에 괴로운데, 그 후 이야기는 점입가경입니다. 더글라스가 지냈던 보호소 학교에서 첫사랑을 만나 연기와 노래에 빠져든 것도 잠시, 그녀는 배우의 꿈을 위해 떠나고 더글라스는 스토킹에 가까운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갑니다. 결국 배우로서 성공해 무대에 오른 첫사랑을 용기 내어 찾아가 보지만 참담한 실상만 깨닫고 절망하죠.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직장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포기할 무렵 드랙퀸들이 공연장을 찾았다가 숨겨진 연기와 노래 실력을 뽐내고 그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부업으로 개들과 소통해 부자들 집을 털거나 가난한 이웃들이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게 도와주면서요. 그러면서도 더글라스는 개들과만 소통하며 외로운 삶을 사는 중입니다. 

 

끔찍하다는 말도 모자란 더글라스의 과거사 때문에 주연배우인 케일럽 랜드리 존스는 연기 차력쇼를 보여줄 기회를 얻습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연기, 드랙퀸 복장을 하고 무대에서 샹송을 부르는 연기, 짝사랑에 집착하고 실패에 절망하는 연기, 현재 시점에서 담담히 과거사를 털어놓는 유치장 안에서의 용의자 연기. 각각 한 편씩으로 만들어도 될 법한 강렬한 서사가 네다섯 개 붙어 있다 보니 이걸 다 감정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케일럽 랜드리 존스의 연기가 대단합니다. 이 배우의 팬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임은 확실합니다. 

 

3. 너무 다른 영화들 생각이 많이 나


케일럽 랜드리 존스는 최선을 다해 연기하지만, 아무래도 영화 너 다섯 편은 섞어 놓은 듯한 이야기의 과잉 때문에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순수한 첫사랑에 집착하는 사회적으로 도태된 남성의 분노는 영화 조커를 연상시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드랙퀸 공연과 길게 삽입되는 노래 퍼포먼스는 영화 헤드윅을, 마지막에 개들의 도움을 받아서 집에 트릭을 설치해 악당을 처치하는 모습은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나 천국을 향해 한 발짝씩 내딛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더 웨일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지요.

 

영화가 전체적으로 감정 과잉, 불행 과잉, 스토리 과잉이라는 감상을 지울 수 없네요. 케일럽 랜드리 존스의 팬이 아니라면 굳이 긴 시간 영화를 보면서 괴로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